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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0.09
교세 급성장의 변혁기

김남수 주교의 재임기 약23년(1974.11~1997.6)을 통하여 수원교구는 비약적인 교세 성장을 이루었다. 신자는 6만 8천 명에서 42만 명으로 증가했고, 사제는 62명에서 248면(교구 소속 외 사제 42명 포함)으로, 본당은 31개에서 100개로 증가했다. 반대로 공소는 33개에서 1985년 398개까지 늘어났다가 이후 급속히 줄어들어 1997년에는 42개소에 불과했다.


이러한 통계 수치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강 이남 경기지역이 급속히 도시화하고 인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수원교구가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농촌지역과 공소 중심의 신앙 형태가 도ㆍ농 지역 및 본당 중심(구역ㆍ반 조직)으로 변화, 정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김남수 주교 취임 초기에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교세 증가가 두드러지지 못했는데 교구 정비가 어느 정도 완료된 1976년부터 다시 교세 증가폭이 커지게 되었다. 한국선교 200주년을 앞두고 범교구적 차원에서 진행된 '200만 신자 확보 운동'과 맞물려 수원교구에서도 본당의 반 조직과 공소 단위로 신앙공동체를 발전시키고 교육과 전교 등의 활동에 매진했다. 이러한 교세 확장 추세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교구 설정 20주년인 1983년에는 수원교구 지역 주민 중에 신자의 비율, 즉 복음화율이 처음으로 5%를 넘었고, 이후에도 매년 1만 명 이상의 신자가 증가하게 되었다.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계기로 수원교구는 민족복음화와 이웃 민족들의 복음화를 향후 사목 목표로 설정하면서 교구 내 선교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교구 은경축(25주년)인 1988년에는 신자 20만 명에 복음화율이 6%를 넘게 되었다. 당시 14개 교구 중 신자 수 4위, 복음화율 3위를 차지할 만큼 수원교구의 교세 확장이 두드러졌다.


1980년대 후반 서울 인근 수원교구 지역에 대규모 주택단지가 개발되고 서울 인구가 유입되면서 교세 증가 추세는 계속 이어졌다. 1990년 이후 수원가톨릭대학교에서 사제를 배출하면서 해외 선교가 함께 교구 내 복음화에도 더욱 박차를 가해 교구 설정 30주년이 되는 1993년에는 신자 30만 명에 복음화율이 7%를 넘어섰다.


교세 증가 추세는 김남수 주교가 퇴임하는 1997년까지 계속 이어져 신자는 40만 명을 넘어섰다. 1997년 당시 신자 수로는 서울대교구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신부나 본당 수에서도 서울대교구와 대구대교구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의 외적 성장이 둔화되고 냉담자와 행방불명자의 수치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서 수원교구 역시 90년대 초반부터 선교율(신자 100명당 성인 영세자 수)이 하락했다. 특히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도시 본당의 선교율이 더욱 큰 하강곡선을 그렸다.


계속적인 신자 증가에도 불구하고 신자 증가율이 하향 추세인 것은 본당이 대형화되고 사제당 신자 수도 늘어나 사제의 신자 관리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진단했다. 신자 증가 역시 주된 원인은 선교의 결과가 아닌 인구 유입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1990년대 이후 수원교구는 본당 증설과 지속적인 선교라는 당면 과제와 함께 신앙생활 활성화를 위한 구역ㆍ반의 유기적인 조직 관리와 청소년 사목이 주요한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첫번째 사진 - 가톨릭신문 1988.10.09, 제1625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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